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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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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은 692년에 제작된 통일신라 시대의 금제 불상으로,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를 띤다. 얼굴은 크고 미소를 띠고 있으며, U자형 옷주름, 시무외인과 법의 자락을 쥔 손 등은 인도 불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 불상은 삼국시대 고식 불상의 특징과 새로운 요소가 공존하며, 7세기 후반 통일신라 조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12각 받침대 위의 연화대좌 위에 서 있으며, 황복사 삼층석탑에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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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이름경주 구황동 금제여래입상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立像)
영문 이름Gold Standing Buddha from Guhwang-dong, Gyeongju
지정 번호80
유형국보
지정일1962년 12월 20일
시대통일신라시대(692년경)
소장국립중앙박물관
주소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문화재청 ID11,00800000,11

2. 특징

이 금제여래입상은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춘 완전한 형태이다. 신체 비례상 얼굴이 큰 편이며, 삼국시대 고식 불상의 특징과 새로운 요소가 함께 나타나 있어 7세기 후반 불상 양식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인도 아육왕 계통 불상의 특징인 U자형 옷주름과, 쿠샨 및 굽타 시기 불상에서 보이는 손 모양(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법의 자락을 쥠)을 하고 있다. 광배는 정교하게 투조된 보주형 두광이며, 대좌는 12각 받침대 위에 복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이다.

2. 1. 세부 양식

머리는 소발에 큼직한 육계가 얹혀 있으며, 통통하고 살이 붙은 얼굴에는 크게 뜨고 있는 눈과 약간의 미소가 나타나 있다. 양어깨에 걸친 두꺼운 통견의 법의는 가슴 위쪽에서부터 일정한 간격을 두고 U자형의 옷 주름을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으며, 이중으로 주름을 표현하여 옷의 양감이 강조되어 있다. 그러나 옷자락 끝 부분이 좌우로 약간 뻗어 있는 점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고식 불상의 특징이다.

가슴 앞에 늘어진 연속적인 U자형의 옷 주름 형식은 인도의 아육왕(阿育王; Asoka) 계통의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전설적이나 실제로 존재하는 우진왕(優塡王; Udyana) 계통의 불상형식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대표적인 착의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유사한 옷 주름을 보여주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는 경주 남산 금광사지에서 발견된 석조여래입상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금동약사여래입상(보물 제328호) 등을 들 수 있다.

오른손은 위로 들어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나, 왼손은 법의 전체를 끌어당겨 옷자락 끝 부분을 움켜쥐고 있는데, 이러한 표현 역시 인도의 쿠샨이나 굽타 시기의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더욱이 법의의 옷자락 끝을 쥐고 있는 예는 중국 산서성 및 섬서성에서 발견된 불상에서 드물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불상 형식은 인도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배는 보주형의 두광으로 되어 있으며, 연화문을 중심으로 방사선의 문양이 있고 가장자리에는 화염문이 정교하게 투조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대좌는 불상과 따로 주조하여 끼워 놓은 것이며, 12각의 받침대 위에 복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가 놓여 있다.

3. 기록

황복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652)에 의상이 출가한 절이며, 신라 경문왕이 화장한 곳이라는 기록이 있다. 황복사지 삼층석탑 2층 옥개석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뚜껑 안에는 신라 신문왕, 신라 효소왕, 신라 성덕왕 대에 걸쳐 불사리와 불상, 경전 등이 탑 안에 봉안된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2]

3. 1. 명문 내용

황복사의 창건 연대와 창건자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으나 신라 진덕여왕 6년(652)에 의상법사가 출가한 절이며 신라 경문왕도 이 사찰에서 화장했다고 하는 기록만 남아 있다. 현재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과 십이지상, 귀부 등 석재 유물만 남아 있을 뿐이다. 삼층석탑의 2층 옥개석에서 발견된 금동사리함 뚜껑 안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효소왕이 신문왕을 위하여 692년에 삼층석탑을 건립한 후 성덕왕이 효소왕과 신목태후를 위하여 706년 5월 30일에 불사리 4과와 六寸|육촌중국어 크기의 아미타불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탑 안에 다시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명문의 내용과는 달리, 실제로는 탑에서 입상과 좌상의 순금제 불상 2점이 발견되었다.[2]

4. 역사적 의의

이 금제여래입상은 얼굴 표현이나 신체 비례 등에서 삼국시대 고식 불상의 특징이 남아 있으나, 옷 주름이 여러 겹으로 늘어진 표현 등에서는 새로운 요소가 나타나 있다. 692년이라는 조성 연대가 확실한 신라 왕실 발원의 불상일 뿐 아니라 7세기 후반의 불상 양식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옷자락 끝을 쥐고 있는 표현은 인도의 쿠샨이나 굽타 시기 불상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특징이며, 중국 산서성 및 섬서성에서 발견된 불상에서도 드물게 나타나므로, 인도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인도와의 직접적인 불교 문화 교류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2010-06-28
[2]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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